쉽게 감화되는 사람

요즘 책 한 권, 한 권을 읽을 때마다 나에게 감사하다고 말하는 K차장님이 있습니다. 

지적 허영심, 킬링타임, 수면용... 그 이유가 무엇이 됐든,
책 읽는 걸 최대한 생활화하려 노력하는데요,
사실 독서는 글 쓰는 걸 직업으로 삼는 사람도 시간을 핑계로 피해가게 되는 취미이긴 합니다. 

저는 그래도 잡지기자라는 특이한 이력을 가진 사람이라, 현 회사에사는 다른 분들보다 조금은 트여있고, 이런저런 것을 빠르게 취하고 있을 거라는 기대를 갖는 듯합니다. 

물론 이 회사로 이직하면서 저는 생각보다 사람들이 세상사에 관심 없고, 연예인에 무감하다는 걸 알게 돼 조금은 허무했지만,
이게 평범한 사람들의
평범한 삶이라는 생각도 하게 됐습니다. 

여기까지 회사에서 저의 포지셔닝이나 캐릭터를 알려주기 위한 배경설명이었습니다. 

그런 저에게 K차장님이 출퇴근하는 동안 볼 만한 OTT콘텐츠 추천을 종종 부탁하셨어요. 아무래도 최근에 인상 깊게 봤던 영화나 드라마가 쉽게 떠오르더라고요. 저는 바로 직전 주말에 영화 <더 웨일>을 봤습니다. 

제 기준에서 좋은 콘텐츠는 시간이 지나도 자꾸만 어떤 장면, 어떤 대사, 어떤 감정을 떠올리게 하는 것인데요, <더 웨일>은 그 조건에 매우 충족되는 좋은 영화였습니다. 그래서 주저 없이 그 영화를 추천했습니다. 
이 말도 덧붙였어요.

"이 영화가 엄청 흥미진진한 건 아니에요. 그런데 영화를 보고 나서 울림이 있는 건 확실해요"

사실 K차장님의 취향을 확실히 알지 못해 일단 던지고 봤습니다. 이전에도 비슷한 이유로 한 과장님에게 영화 <노인을 위한 나라는 없다>를 추천했다가 혹평을 들은 적이 있거든요. 그래서 한편으론 이 영화가 K차장님에게 재미없다면, 앞으로 내가 무엇을 추천하든 K차장님의 시간을 낭비하게 되는 것이라 생각했어요. 

며칠 후, <더 웨일>을 봤다며 K차장이 성심성의껏 감상 후기를 들려주더라고요. 

"전 과장이 추천할 때 왜 그런 말을 한 줄 알겠어. 그런데 마지막 장면에서 나도 모르게 눈물이 왈칵 쏟아지더라고. 그리고 영화를 보고 나니까 <모비딕>이라는 책을 읽고 싶어졌어"

그렇게 그 두툼한 책을 읽기 시작한 K차장님은, 본격적으로 책을 추천받기 시작했습니다. 저는 어디까지나 제가 읽었던 책 위주로 추천했습니다. 아마 <더 웨일>이 취향에 맞는 사람이라면 내가 본 책, 영화 역시 충분히 먹힐 수(?) 있을 거라는 자신감이 생겼던 것 같습니다. 

추천하는 책은 장르를 넘나 들었습니다. 제가 그랬던 것처럼 말이죠. K차장님에게 열독의 티핑포인트가 된 책은, 저에게도 강렬한 영감을 줬던 소설인데요. <파친코>였습니다. 오랜만에 이야기가 궁금해 아껴가며 읽었던 소설이었습니다. 박경리 작가의 <토지>, 조정래 작가의 <태백산맥> 이후로 그렇게 강렬하게 빠져드는 경험은 오랜만이었습니다. 다행히 K차장님 역시 그렇게 독서의 재미에 흠뻑 빠지게 됐습니다. 저의 추천 리스트를 완전히 신뢰하게 된 거죠. 

K차장님은 지금 저보다 더 뜨거운 열독가가 돼, 삼국지 6권 중 2권 이후로 진도를 못 빼고 있는 저와 달리, 이미 완독 후에 그 다음 책을 골랐다고 알려왔습니다.

모든 사람에게 적용되는 말인지 모르겠지만,
저는 확실히 누군가에게 쉽게 감화하고, 그 방향이 지금보다 더 나은 곳이라면 기꺼이 변하고 움직이는 사람을 좋아하는 것 같습니다. 아마 저 역시 그런 사람이 되고 싶어서 일 것입니다. 
나이를 먹으면서 본인의 취향, 성격, 습관 등을 바꾸는 게 얼마나 힘든지 잘 알기 때문이죠. 지금까지 40년을 살아왔는데 굳이 바꿀 이유가 없을 테니깐요. 그럼에도 불구하고 지금과는 조금 다른 삶, 더 나은 삶을 찾기 위한 노력을 게을리하지 않는 사람이 좋습니다. 또한 내가 좋아하는 사람 중에 내가 반드시 포함되길 바랍니다. 

오늘은 K차장님에게 책을 다 읽고 난 후 짧은 서평과 글 발췌를 어느 앱에 저장하면 좋은지 추천해드렸습니다. 
성격상 책을 깔끔하게 관리하실 것 같아 책갈피 대신 북마크 포스트잇을 사용해 나중에 다시 찾아볼 수 있는 방법도 알려드렸고요.